Jean-Michel Basquiat is one of the most notable artists who did not receive formal art education. It is difficult to find someone as successful as Basquiat in elevating street art to the realm of high fine art. Additionally, no one else besides Jean-Michel Basquiat has earned the nickname "shooting star." This is due to the rapid pace at which he gained recognition from the public and his unusually short artistic journey. His expressive style, which seemed both spontaneous and unrefined, brought freshness and novelty to the art scene in the early 1980s, even influencing the then-fading Andy Warhol.________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한명이다. 스트리트 아트를 수준 높은 순수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리려 노력한 사람 중에 장 미셸 바스키아와 같이 성공적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shooting star'라는 호칭을 얻은 사람도 장 미셸 바스키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대중에게 인정받는 속도가 매우 빨랐던 것과 유난히 짧았던 그의 예술 여정 때문이다. 즉흥적이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은 그의 표현적인 스타일은 1980년대 초반 예술 전반에 신선함과 새로움을 더하기에 충분하였고, 시들해진 앤디 워홀까지 영향을 받을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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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Michel Basquiat, who taught himself art independently, became well-versed in art history through frequent visits to museums. He was among the first to combine elements of Cubism and Abstract Expressionism with ‘Art Brut’, ‘Arte Povera’, graffiti, comics, and tribal imagery. The recurring hip-hop icons, such as crowns, in his works reflect the rise of hip-hop culture at the time. Like hip-hop DJs who mixed jazz, soul, funk, and disco elements, Basquiat merged various stylistic elements to present the urban icons of New York in a new and sophisticated way.
His love for letters and words, which were the starting point for his graffiti, was also unique. Many of his works were composed of words and lists, similar to jazz record playlists. The words served as graphic elements that clearly defined the surface form of his paintings while also narrating urban spaces and history. Until his brief life as an artist ended after about a decade, Basquiat created playful yet politically charged works that critiqued society through constant research and effort. His raw treatment of the absurdities of the world, such as capitalism and racism, continues to be recognized for breaking down the barriers between what is considered art and what is not.
혼자서 독학으로 예술을 터득한 바스키아는 뮤지엄을 자주 드나들면서 예술의 역사에 대해서도 섭렵하게 된다. 입체파(cubism)와 추상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요소들, ‘Art Brut’, ‘Arte Povera’와 그래피티, 또 만화와 부족적 이미지를 결합한 것을 처음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왕관과 같은 힙합 아이콘이 반복적으로 보이는 것도 당시 힙합 아이콘의 급부상에 인한 것이라 하겠다. 힙합 디제이들이 재즈, 소울, 펑크와 디스코 등의 요소들을 합치는 것처럼 바스키아도 여러 문체적인 요소들을 합쳐 새롭고 세련된 방법으로 뉴욕의 도시적인 아이콘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래피티의 시발점이 되었던 글자와 문자에 대한 애정 역시 남달랐다. 꽤 많은 작품이 단어와 목록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재즈 음반의 재생 목록 같은 것도 있었다. 단어들은 그래픽 요소로써 그림의 표면적인 형태를 분명하게 나타냄과 동시에 도시 공간과 역사를 이야기한다. 10여 년 남짓한 짧은 작가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바스키아는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통해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담은, 결코 가볍지 않은 정치적인 작품들을 탄생 시켰다.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등 세상의 부조리함을 날 것 그대로 다룬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벽을 허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